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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이야기

삼국지 시대 철기 문화 수준은 어느 정도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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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하문명, 이집트, 인더스. 메소포타미아 세계에서 가장 문명을 발달시킨 4대 문명이다.

공통점은 모두 북반구에 위치하고 있고 큰 강을 끼고 있어서 농업 발달에 유리해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중국 대부분 지역에서는 청동기는 제기와 무기로 사용됐다. 

 

 

중국 동남부에서 최초로 청동을 대거 농기구로 제작 활용하기 시작했다.

철은 당시에도 간간히 사용되었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운석이 떨어지면 그것을 활용해 만들어서 사용했다고 한다. 

철의 녹는점은 주석과 구리에 비해서 500도 정도 높은데

당시의 화력은 천도 가량 안팎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철이 있음에도 활용할 수 있는 기술이 없었다.

철의 녹는점이 1500도였고 수력 풀무가 개발되기 전까지는 철의 대량생산이 부족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삼국지 시대 유비가 탁 군에서 도원결의를 할 때 즈음

 184년 황건적이 대거 출현하고 난세가 시작되는 시점에 철기는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

너무나도 궁금했다. 

관우의 청룡언월도는 82근이나 했다.

 

그렇다면 18kg의 무게가 나간다는 소리인데

184년는 후한 즉 한나라가 망하기 직전의 시점이고 철기의 초기시대이다.

중국인들이 한나라에 대한 애정이 강해서일지 모르겠지만

언월도는 송나라 시절에 개발이 되는 무기였다. 아무래도 송나라 시대의 

연의를 써 내려갔던 나관중에게는 당연하게도

멋있는 무기를 찾는 중 좋은 아이템일지는 모르겠지만

후한의 무기는 검 , 과, 모 정도밖에 없었다고 한다. 

 

 

하물며 18kg의 철을 얻기 위해서는 정통 방식으로 소실되는 철이 많기 때문에

70~80kg 정도의 철의 양이 필요한 것을 보았을 때 

굉장히 효율이 없었을 것이 틀림이 없다.

18kg를 들고 다닌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당시의 평균 키가 160cm 이하인 것을 감안했을 때 

  거인처럼 느껴지는 키는 170 이상일 것이었다.

지금의 평균 키인 사람도 2.5kg 소총도 무겁다.

그때 당시에는 거인이었을 것을 감안한다면 

무거운 무기는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위의 사진에서 볼 수 있듯 청동기 이후에도 주조틀을 이용해 

제작을 했기 때문에 검은 지금의 형태와는 조금 다르게 둥근 형태였다.

하물며 청동검의 약함과 무거움 때문에 철을 선택한 한나라 사람들이

무거운 언월도를 사용할 생각을 했을까?

만드는 사람도 그 정도의 기술이 없없을 것이며 주조 기술을 사용한

언월도의 내구성은 굉장히 약했을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무기의 내구도가 좋지 않고 균형을 제대로 잡지 않는다면 베기 자체도 힘들고

방향성을 바꾸는 동작을 한번 할 때마다 진땀을 뺐을 것이기 때문에

효율성이 없는 무기를 썼을 리는 없었다.

 

 

 

 

 

위의 사진은 극인데 아무래도 만능 무기를 원해서 인지

찌르기와 베기가 가능한 무기를 선호한 모양이다.

방천 화극 역시 당시에는 없었고 송나라 시대의 무기이다.

여포의 방천 화극 역시도 그 당시에는 없는 무기였을 것이며 고작 써봐야 극의 초기 형태인 모 일 것이다.

찾아보는 과정 중에 창을 자주 사용한다는 내용도 없었는데 이 것 또한 신기하다.

그렇다면 창술의 대가 조운도 허구일 가능성이 큰 것 아닌가..?

당시에 모와 과를 쓰는 정도였는데

 

지금의 유튜버들을 찾아봐도 일본도와 창술의 싸움에서는 압도적으로 창술의 우세가 나타난다.

그렇다면 창술이 강했다면 검을 쓰는 중국인들을 쉽사리 제압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창에 대한 내용은 2~3세기경부터 나온다는 것을 본다면 창 또한 늦게 개발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운이 존재했다고 해도 창술의 대가가 아닌 모를 사용한 조운이 있었다는 것이 조금 아쉽긴 하다.

 

또한 그 당시에 무거운 무기를 쓸 수 없는 결정적인 요소가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바로 편자와 등자이다.

 

 

 

중국에서 등자가 발명이 된 것은 서기 2~3세기부터 사용되었다.

 

중국 편자(제철)가 등장한 것은 그보다 300~400년 후인 당(618~907) 시대에 이르러서다.

 

 

 

등자와 편자에 대해서 할 말이 굉장히 많다. 기원전 3~4천 년 전부터 말과 함께한 사람들이지만 등자는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 사례로 연의에도 비탄 지육이라는 말을 한다. 유비가 전쟁터에 나가지 않으니 허벅지에 살이 붙는다는 말인데

그 말은 등자 없이 전쟁을 해왔기 때문에 승마를 함에 있어서 굉장한 허벅지 근육이 필요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즉 전쟁터에서 낙마하는 사건이 굉장히 많았을 것이고 낙마를 자주 한다는 것은 근접전에 강해야 하고 근접 접에 강하다는 것은 무기가 그렇게 세지 않으니 격투술이 좋아야 한다는 뜻이다.

 

즉 연의의 기록처럼 무기를 사용해서 싸웠다기보다는 격투술과 레슬링이 발전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점이 들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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